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울 요제프 괴벨스/생애 (문단 편집) === 성장 과정 === >어른들의 모욕적이고 동정 어린 시선과 친구들의 놀림 때문에 괴벨스는 신체적 장애가 모든 것에 그늘을 드리운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집 밖으로 나가기를 꺼리게 되었다. 그는 달렌 거리의 작은 집 2층에 있는 좁은 자기 방에 틀어박히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22살 때 괴벨스는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그때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고 썼다. 친구들이 그를 창피해하는 이유는 "그가 그들처럼 달리고 뛰어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때때로 외로움은 괴로움이 되었다. (...) 다른 아이들이 자신과 함께 놀려 하지 않는다는 생각,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고독은 그를 자포자기 상태에 빠뜨렸다. 다른 아이들이 달리고 마구 설치고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하느님에게 불평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같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게 되었고, 자신과 같은 병신을 여전히 좋아하는 어머니를 비웃게 되었다." >... >"하느님은 왜 경멸과 조롱을 받도록 그를 만들었는가? 왜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과 삶을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없는가? 왜 사랑하고 싶고 사랑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고 증오해야 하는가?" 그래서 그는 신을 원망했다. "때때로 그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 괴벨스의 반(半) 자전적 소설 <미하엘>에서[* 미하엘은 어려운 삶을 살았던 친구를 모델로 쓴 글이라고 알려져 있다.] >----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23p, 27p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폐병을 앓아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났지만 몸이 허약하게 된 데다 골수염(骨髓炎)에 걸려 오른쪽 발이 굽었다. 또 발육부진으로 오른쪽 발이 왼쪽 발보다 3cm가 덜 자라서[* 브레히트는 '''"거짓말은 발이 짧다."'''라는 서양속담을 인용하여 괴벨스의 이러한 짧은 발과 그가 보여준 능수능란한 거짓말 스킬을 엮어 풍자하기도 했다.] 10세 무렵에는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큰 돈을 들여 수술을 해보지만 실패했다. 결국 괴벨스는 평생 보행용 의족을 끼고 다녀야 했다. 그렇게 굽어진 다리 때문에 또래 아이들은 그를 놀렸고, 이에 괴벨스는 자기 자신을 열등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내성적 성격으로 변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남들과 다른 모습이 컴플렉스가 되어 늘 우울해했다고 한다. 선천적인 장애가 지금보다 더 손가락질 받던 시절, 괴벨스와 그의 어머니는 다리의 장애를 불의의 사고라고 둘러대고 다녀야 했다. 괴벨스의 이런 변명은 나치당에 들어가고 선전장관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열등감 때문에 괴벨스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남들과 똑같이 뛰어다니지 못하는 좌절감에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나아가서 인간 자체를 증오했다. 훗날의 열정적인 연설과 달리 인간으로서의 괴벨스는 사람들에게 무서울 정도로 차갑고 계산적이었다는 의견이 많다. [[파일:attachment/파울 요제프 괴벨스/goebbels_early.jpg|width=250]] 어린 시절 모습. 오른쪽이 괴벨스다. 장애를 잊고 남들보다 돋보일 수 있었던 재능은 허약한 체구나 굽은 다리와는 상관없이 잘할 수 있는 공부였다. 괴벨스는 좋은 머리로 태어났고 무엇보다 건강한 몸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죽기살기로 공부를 해서 일찌감치 수재로 평가받았다. 또 여기에는 자식이 장애를 입은 것을 가련해 하는 부모의 지원이 뒤따랐는데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부모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없는 살림에도 아껴서 그를 지원했다. 파울 괴벨스의 두 형은 실업학교만 졸업했던 반면 괴벨스는 실업학교를 졸업한 후 인문계 김나지움에 진학했던 것.[* 당시 독일의 학제에 따르면, 초등학교 4년과 레알슐레(실업학교) 6년을 거치면 취업 전선에 뛰어들거나 실용 과목을 다루는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 가서 순수학문을 전공하려면 인문계 김나지움 3년 과정을 추가로 이수하고 대입시험(아비투어)를 통과해야 했다. 학자금 대출도 없던 시절 김나지움과 대학 학비는 괴벨스네 같은 중류층 이하의 집안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 때문에 아버지가 일하는 심지공장 일을 집에서 가져와 부업으로 파울 괴벨스의 가족들이 램프 심지를 만드는 잔업을 밤에도 했다고도 한다. 학창시절에 파울의 부모는 파울이 가톨릭 [[사제(성직자)|사제]] 교육을 받길 바랐다. 왜냐하면 사제 공부를 하면 상급학교에 다녀도 학비가 면제되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파울 괴벨스의 부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데다가 부모로서 자신의 자식의 신체장애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잠시 사제가 되는 것을 고민했지만 결국 부모의 뜻에 따르지는 않았다. 여기엔 마침 아버지가 심지공장에서 승진해 관리직이 되어 급여가 많이 오르면서 경제사정이 조금 풀려 부모가 파울의 학업을 지원할 여건이 된 데다, 괴벨스 본인도 수재였던 덕에 장학금과 과외 수입, 후원금 등을 받아 학비 부담을 많이 줄였던 점이 가미되어,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